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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

김언하 (동서대학교 외국어학부)
 
상해의 조선인 영화 황제

<상해의 조선인 영화 황제>

스즈키 쓰네카쓰 저/이상 역 | 실천문학사

     

    1930년대에 중국영화계를 주름잡으며 ‘영화의 황제’로 군림했던 인물은 한국인 김염(金焰: 1910-1983)이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하고 그가 남긴 발자취를 끈질기게 추적하여 영화 황제 김염의 삶과 예술을 감쪽같은 망각으로부터 건져낸 사람은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 스즈키 쓰네카스(鈴木常勝)였다. 나는 김염 의 생애를 추적한 이 약간 특이한 전기(傳記) 《상해의 조선인 영화황제》를 감격과 흥분 속에서 읽고 또 읽었다.  현대 중국의 문학사를 제대로 알고 싶을 때 우리는 ‘중국민족의 영혼’이라고 평가받았던 루쉰(魯迅)을 찾아야 하듯이, 현대중국의 영화사를 실감나게 이해하고 싶을 때 우리는 ‘영화의 황제’ 한국인 김염의 인도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 김필순은 도산 안창호와 결의형제를 맺고 신민회를 결성했으며, 그가 두 살 때인 1912년에는 일제에 쫒겨 가족을 모두 데리고 중국 땅으로 건너간 뒤에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이상촌 건설에 헌신했던 의사이다. 그가 태어나던 해에 나라가 망했고, 9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중국 땅에서 사망했다. 천진(天津)의 남개중학(南開中學) 시절 님 웨일즈의 《아리랑》으로 유명해진 김산(金山)과 현대중국을 대표하는 극작가 조우(曺禺)를 만났으며, 노신(魯迅)의 작품을 읽고 감명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김신(金迅)으로 바꾸려고 했다. 1927년 혼자 당시의 국제도시 상해(上海)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하다가 ‘시인 감독’ 손유(孫瑜)를 만나 1930년대 중국영화의 간판스타가 되어 왕인미, 완령옥, 유경, 전방 등의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 스크린을 수놓았다. 그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문학가 전한(田漢), 그의 친구이자 중국 국가(國歌)를 작곡한 음악가 섭이(聶耳), 1947년 진이(秦怡)와 결혼할 때 주례를 섰던 곽말약(郭沫若), 이처럼 그가 교류했던 인물들은 하나같이 현대중국의 예술사, 혁명사, 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겨놓은 거물들이었다. 그는 영화예술에 기여한 탁월한 공로에 힘입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 중국 전역에서 단 3명뿐이었던 1급 연기자(행정부의 장관보다 높은 지위)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1962년 위궤양 수술을 받다가 일어난 1만 명에 1명 꼴로 발생하는 위 신경 절단 사고로 인해 영화계를 은퇴했다.

     

      김염은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 동포들(조선족) 사이에선 일찍부터 자랑스러운 조선인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우리에겐 수십 년 동안 까마득히 잊혀져 있었던 한민족의 영웅인 셈이다. 일제의 침탈이 없었다면 그가 중국의 북방 천진(天津) 땅에서 표준 중국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표준 중국어를 구사할 줄 몰랐다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1930년대의 중국 상해(上海)에서 영화배우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아버지를 잃은 원한이 없었다면 스크린에 분노와 반항의 열정을 그토록 자연스럽게 풀어놓아 일제의 침략에 격노한 중국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지도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