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ol 4 >> 한 권의 책 |
한 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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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강진 (동서대학교 미디어창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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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판권
지음/ 2002 / 지성사
“별의 수효를 세면서, 별자리를 그리면서 밤길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까마득히 어릴 적 어머니 등에 업혀서 본 총총한 별, 아직도 그때 느꼈던 별빛의 강렬한 인상은 아직도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북극성을 제외하고는 철따라 나타나는 별 자리 이름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 답답하기 짝이 없다.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 이름 자체가 사물의 성격 전부를 나타낼 수는 없을지라도 문자 언어가 아니면 표현할 별다른 방법이 없다. 이름 붙이기와 이름 알기는 사물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인식 행위에 속한다. 사물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이름 알기는 매우 중요한 인식과정이다. 어린아이들은 대상물의 이름에 대해 항상 질문한다. 앎에 대한 사랑이 철학이라면 이들은 꼬마철학자인 셈이다. 호기심은 세상을 향한 대화이다. 예민한 촉수를 통해 객체를 이해하고, 주체의 인식능력을 확장한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객체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정체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저자는 일상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나무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질문을 하고 있다. 봄이 되면 링거 같은 병에 꽂혀 사경을 헤매는 ‘고로쇠나무’는 어떤 나무인가?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곳은 살구나무 아니면 은행나무 아래서인가? 동요「반달」에 나오는 ‘계수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의 경판은 어떤 나무로 만들어졌는가? 고흐는 죽기 직전에 왜 측백나무를 그렸는가? 저자의 질문에 답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나무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촉수가 둔감해진 터일 것이다. 책의 제목으로 내세운 ‘나무 세기’는 상징적 표현이다. 서 있는 나무의 수를 셀 수 있다는 것은 나무에 대한 일차적인 관심의 결과이다. 그 다음은 자연스레 나무의 종류를 알고, 그 나무의 생태 섭리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인간사회와 나무에 관련된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맥락을 아울러 추적하고 있다. 여기서 나무 세기를 꼭 자연과학자들만이 갖는 특권으로 고집할 필요는 없다. 요즘은 지나치게 학제로 구분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존재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안목을 키우는 통합적 과정을 이루고 있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은 모두 학문의 범주로 수렴되었고, 학문하는 요령을 사물에 대한 이해에서 찾았던 것이다. 나무 세기는 공부하는 방법이자 세상 읽기의 한 방식인 셈이다. 사물을 연상하지 못한 채 이름 부르는 행위는 무의미한 독백에 불과하다. 인간과 무관한 자연은 영원한 객체로 남을 뿐이다. 우리 주변의 풀과 나무의 이름을 기억한다면 사랑하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요산 김정한 선생이 “온산에 이름 모를 풀과 꽃들이 피었구나”라는 표현을 언급하면서 작가정신의 무책임함을 준엄하게 질타한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세상과 대화하는 소중한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사소하다고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거창하다고 해서 반드시 의미가 있지는 않다. 큰 돌을 들어야만 얼굴이 붉어지는 것처럼 처음부터 가치가 있고 위대한 결과를 도출하기란 쉽지 않다. 학문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젊은이는 주변 사물에 대한 참신한 시각을 마련해야 하고, 무엇보다 앎에 대한 의지가 강해야 한다. 강의실 안팎에서 촉수가 번뜩이는 학생들을 만나고 ‘세어’ 보는 일은 항상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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